리장(쬚江)의 데자뷔(deja vu)

야간의 공항 대기실에 앉으면 왠지 쓸쓸하다. 창문 밖에 비치는 차가운 아크등 불빛, 보이는 것이라곤 멈춰 선 여객기 몇 대와 어둠 속에 길게 펼쳐진 활주로뿐이다. 텅 빈 밤중의 도시를 뒤로 하고 그날의 마지막 심야 열차로 떠나는 것처럼, 외롭고 공허한 마음은 정처 없이 탑승 시간만 기다린다. 여행 준비로 피곤했던 하루, 게이트에 연결된 다리를 걸어가며 리장의 천변(川邊)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계림(桂林)은 두 번째 방문이고, 공항은 베이징 올림픽 직후와 마찬가지로 옛 모습 그대로다. 공항 대합실을 나와 대기한 승합차를 타고 밤중의 도로를 달린다. 계수나무를 닮은 네 잎사귀 모양의 노란 가로등이 차창에 끝없이 이어진다. 도시의 불빛이 꺼져가는 한적한 도로에는 용수(榕樹)나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40분이 지나 도착한 시가지 외곽의 허름한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객실의 침대에 피곤한 몸을 누인다.

짧은 새벽을 지나 눈을 뜨면 평평한 분지의 도시 위로 부서지는 아침의 햇살, 시가지 곳곳에 솟은 특이한 이국(異國)의 산봉우리들이 창가에 다가와 있으리라. 10월의 구이린(桂林) 거리에는 계수나무의 둥근 잎이 노랗게 물들고 붉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창문을 열면 계수나무의 잎과 줄기에서 품어나는 그윽한 초콜릿 향기가 당신의 감성을 풍성하게 하리라. 그리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객실 발코니에서 따뜻한 홍차 한 잔을 마시고, 사람들과 전기 스쿠터로 넘치는 용수나무와 계수나무의 거리를 지나 리장의 선착장으로 향하리라.

■리장

이른 아침 일찍 도착한 선착장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낮게 드리운 물안개는 강변 숲을 적시고 산기슭을 가리고…, 유람선과 뗏목, 시멘트 계단을 어슬렁거리는 관광객과 빨래하는 아낙네들까지 모두가 실루엣의 향연이다.

안개구름 위로 멀리 몇 개의 산봉우리가 떠다니는 하늘, 아열대 지역인 이곳도 가을이 오는 걸까. 청명한 하늘빛이 호수를 이루고 포구의 선선한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뱃고동이 울리고 요란한 엔진소리, 배가 출발하면서 강변 숲의 새들이 잠에서 깨어나 강물 위로 날아오른다. 일렬로 이어지는 수십 척 유람선의 행렬, 뱃머리에서 선실 지붕 위로 걸친 3색의 작은 천 조각들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배가 협곡을 헤치고 나아가면, 리장을 압도할 듯이 기암괴봉이 병풍처럼 버티고 서 있다. 관광객들로 가득한 배들이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 같은 풍경 속을 미끄러지듯 달려간다. 양숴(陽朔)까지 이 백리 물길, 드넓은 강변과 강변에 늘어선 무성한 숲을 지나 리장은 먼 산의 봉우리를 향해 쉼 없이 흘러간다.

한적한 천변에 따가운 햇볕이 내리 쬐고 있다. 한가롭게 물소를 목욕시키는 노인이 앉아 있고, 그 뒤편에 빨래동이를 머리에 이고 가는 아낙과 아이들이 갈대밭 수풀 속을 걸어간다. 낮은 제방 너머로 이어지는 황토길, 그곳 어딘가에 마을이 있는 걸까. 험준한 계곡 깊숙한 그늘에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리장의 깎아지른 산등성이에는 안타까운 부부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망부석과 선명한 색실로 자수를 놓은 것 같은 수산(繡山) 등, 전설 같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신과 인간이 함께 살아간다는 좡족(壯族)의 샤머니즘, 수풀 사이로 난 작은 길을 헤쳐 가면 우리와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강에도 물길이 있어 유람선은 자주 방향을 바꾸고 속도를 줄인다. 유속이 빠른 곳과 암초를 피하기 위함이다. 리장의 사람들에게 굽이굽이 흐르는 강은 그들이 하루를 살아가는 힘겨운 일터이지만, 나는 그 곳을 잠시 구경하며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배와 뗏목이 다니는 리장의 물길, 아낙네와 아이들이 사라진 보이지 않는 마을길, 새들이 날아가는 산봉우리의 하늘 길, 아득한 길 위에 그들의 삶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은 생명과 존재의 예술이다. 존재의 근원(Ursprung)에 이르고, 또한 근원에서 이어져 나오는 길, 그 어디쯤에 내가 서 있는 것일까. 리장의 물길을 보며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의 숲길'을 생각한다.

수평선에는 한낮의 햇살이 부서지고, 잔잔한 물결 위에는 가까이, 멀리 산과 계곡의 모습이 비친다. 쓰촨성 구채구(九寨溝)의 호수가 하얀 석회석과 푸른 하늘이 반사된 찬연한 코발트빛이라면, 리장의 물빛은 평범하지만 산과 숲, 하늘 그림자를 담은 순수한 자연의 모습 그대로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가파른 협곡을 돌고 돌아 리장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니 자연의 이치를 어찌 물빛의 색깔로만 표현할 수 있으랴.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 라는 말은 바로 리장의 어우러진 경관을 이름이 아닐까. 리장의 뛰어난 풍광은 20위안의 중국 지폐에도 새겨져 있을 정도로 중국인에게 익숙하다.

사람 얼굴의 이목구비와 신체의 전체적 구성이 그러하듯이 인체의 미는 대칭과 균형이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리장은, 비교할 만한 반은 존재하지도 않고 굳이 반으로 나눌 이유도 없다. 자연의 풍경은 대칭이 없으며 다양성과 풍요로운 조화(調和)만 있을 뿐이다. 홍수에도 넘치지 않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리장의 맑은 물, 기암의 산봉우리와 강변의 전설, 청명한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마음을 온전히 평화롭게 한다. 굳이 사람과 비교한다면, 리장의 산수는 그저 예쁘고 잘난 미인의 모습이 아니라, 편안하고 소박한 인상이 주는 푸근함과 넉넉함이랄까.

이층 갑판의 뱃머리에서 앉거니 서거니 2시간이 지나니 선상유람의 피곤함이 몰려온다. 여행객들도 선실로 내려가고 주위엔 아무도 없다. 생각이나 느낌조차도 내 것이 아닌 듯 더 이상 유람선의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강물은 하늘호수가 되고, 그 위에 무수한 산봉우리가 떴다가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곤 한다. 무념무상의 의식 저변에 언젠가 어디선가 이곳을 보았고 여기에 머물렀으리란 느낌, 리장의 데자뷔가 아련한 추억처럼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오랫동안 잊어왔던 금호강 청천의 버드나무숲과 낙동강 다산면 강변에서의 정경, 산들은 멀리 있고 느티나무 들판에 나지막이 교회 종소리가 울리던 시골 마을의 평화로움.., 리장의 환상적인 풍경에서 꿈을 꾸며 지난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새기고 있는 것일까.

의식의 심연에서 불현듯 솟구치는 젊은 날의 그리움이 리장의 강변을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어우러진 곳에서 꿈과 현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현실의 환상 속에서 지난날의 또 다른 꿈을 꾸고, 마침내 리장의 풍경마저도 사라진다.

가마우지의 울부짖음 소리에 흠칫 놀라 깨어난다. 리장의 강변에 몰려다니는 수십, 수백 마리의 가마우지 떼, 어부의 뗏목이나 유람선이 지나면 천변의 자갈밭은 가마우지의 피난처가 되고, 강변은 낮게 날아오르는 새들의 무리로 어지럽기가 그지없다. 요즘은 중국 정부에 대한 동물보호단체의 항의로 전통적인 가마우지 낚시가 금지되어 있으니, 고삐 풀린 가마우지의 개체 수 증가와 물고기의 감소로 인해 리장의 주민들은 가마우지의 처리가 고통스런 현안이 되었다고 한다.

양숴 포구에 이르니 어깨에 물통 지게를 진 젊은이가 걸어간다. 가까이서 보니 그게 아니다. 어깨에 멘 기다란 통나무 양쪽에는 가마우지 두 마리가 앉아있고 물통에는 물고기 대신에 이름 모를 과일이 가득하다. 계림은 중국 내에서도 단 맛이 좋은 과일 재배로 유명한 곳이다. 남루한 행색의 젊은이는 아마도 여행객들에게 가마우지 시연도 하며 과일을 팔기 위해,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고 길을 서두르고 있는 듯하다.

승객들은 선착장의 둑길을 따라서 흩어지고 홀로 강가에 서서 리장을 바라본다. 형언할 수 없는 평온함, 카르스트 지형의 특이한 둥근 산봉우리와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물에 녹아들어 리장은 수려한 경관을 이룬다. 인간의 역사 이전에 자연은 스스로 생명을 잉태했으며, 이곳을 삶터로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리장은 원초적인 고향이다.

그러나 이곳에도 도시문명은 스며들고, 들판과 산 속의 자유롭던 좡족의 사람들이 도시로 흩어지면서 점차 빈곤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

노랑나비 한 마리가 귓전을 스쳐 내 눈앞을 지나간다. 나비의 느린 날갯짓은 소리가 없다. 몰래 다가와 지그재그로 불안한 하강, 강물에 빠질 듯 모래밭 물가에 내려앉는다. 그리고는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디로 갔을까. 강물에도, 자갈돌이 널린 강변에도, 강둑의 잡초 숲에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금 나타나는 존재의 대상과 비대상적 관념과 공간의 경계, 리장의 한적한 강변에서 나는 또다시 노랑나비의 데자뷔를 좇는다.

돌아서는 강변에서 문득 아름다운 상상, 산봉우리 사이로 보름달이 뜨고, 휘영청 달빛이 환한 강물에 홀로 떠있는 나룻배를 본다.

■에필로그

계림의 역사를 생각한다. 진시황의 군대가 처음 풍요로운 이곳에 들어오면서 계수나무가 많다하여 계림이라 불렀다한다. 하지만 정복자의 행위는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감동보다도 그곳에 자기들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어서 당나라가 들어왔고 수려한 산천에 한족의 국가 신화를 뿌렸다. 원주민의 전설과 신화를 지우고, 한족을 이주시켜 요 임금의 설화를 주체화하면서 결국 계림은 한족의 땅이 되었다.

이름뿐인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세외도원(世外桃源)의 풍경구에서 광대로 전락한 원주민들의 애환을 보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오늘날은 영웅이나 지배자가 아닌 물질적인 현대문명이 승자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계림의 여행은 리장을 제외하면 곁가지에 불과하다. 리장의 아름다운 풍광이 언제까지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석회암 은장동굴, 종류석의 인위적인 휘황찬란한 조명에서 수 천 만년 암석의 역사를 어찌 알 수 있으며, 발품을 팔지 않고 유람선에서 즐기는 양강사호(兩江四湖)의 야경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옵션 서커스 쇼를 즐기는 밤 시간에 차라리 노천 시장의 중국인들 속에서 계림 특산의 삼화주(三花酒)를 맛보고, 길거리 악사의 연주를 감상하는 것이 훨씬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칠성공원(七星公園)의 계수나무와 용수나무, 화려한 꽃들, 그리고 판다곰을 구경하며, 화강암 돌다리를 건너 공원길을 산책하면 아열대 가을의 정취가 더없이 풍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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