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산 공원의 울타리에 가을장미의 뽀송뽀송한 꽃망울이 돋아나고 대추 열매가 붉게 익어간다. 산책길 풀숲에 핀 하얀 구절초(九節草) 꽃잎들을 보니 어느덧 가을이 발치에 다가와 있다. 그러나 아직 계절의 초입인데도 돌계단 미루나무는 잎사귀가 반 이상 떨어졌다. 그나마 남은 잎들도 누렇게 퇴색해 가고 나무의 모습이 노숙자 몰골처럼 볼썽사납다. 미루나무와 나뭇잎의 조로(早老) 현상,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 스트레스의 흔적처럼 공원 산책로에 때 이른 낙엽이 쌓여있다.

지난 여름 한 달 이상 한낮의 기온이 35도가 넘는 지독한 폭염의 여파가 휩쓸고 갔다. 골목길에 길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던 거리, 산행길 나무 그늘의 벤치에서도 더위를 식히는 등산객 한 사람 구경하기 조차도 쉽지 않았다. 나는 그런 무더위를 피해 가끔은 퇴근하자마자 인근 칠포리 해변으로 달려갔고, 석양의 바닷바람과 해수욕으로 저녁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찌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동해 바다와 직접 마주한 것은 혹독하게 무더운 여름 덕분이기도 하다.

일교차는 심하지만 초가을의 아침저녁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직장 일을 지치게 하고 밤잠마저도 설치게 했던 혹서(酷暑)의 참담한 기억은 절기가 바뀌면서 서서히 잊어져 간다. 그러나 이번 폭염의 여파는 거리와 숲의 나무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견디기 힘든 극심한 심신의 상처를 남겼다. 산책길 길섶에는 코스모스의 성장과 초록 빛깔도 예년과 같지 않고 개화시기도 늦어지고 있다. 더위에 강한 배롱나무(나무 백일홍) 꽃들만 여름을 지나 가을의 초입까지 오롯이 피어있다.

돌이켜본다면 지난해 여름도 만만찮은 더위였고 그전 해도 그랬다. 아열대 작물의 점차적인 북상처럼 기후온난화의 현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되었지만, 혹서의 여름은 계절의 순환과 함께 언제나처럼 우리의 망각 속에서 사라져 가곤 했다. 아무런 준비도 대책도 없이 되풀이 되는 폭염의 계절, `올해는 괜찮겠지'하는 기대감은 오히려 스트레스의 수위와 강도만 높여놓은 채 또 한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폭염과 함께 수반되는 가뭄과 물부족 사태, 해수의 적조현상 등 자연재해 외에도, 식중독과 같은 수인성 질환과 아열대 전염병의 창궐에 대한 범정부 대책은 매년 구멍이 뚫리고, 올해는 콜레라 발생의 원인조차도 초기에 규명해내지 못한 미숙함을 드러내었다. 심지어 여름이면 서민경제를 압박하는 누진제 전기료 폭탄과 같은 가정 살림의 스트레스까지도 무더위로 인한 정책 이슈로 등장했다. 폭염뿐만 아니라 해마다 반복되는 여러 가지 기후변화의 현상은 세계적이며, 일과성 이변(異變)이 아니라 대비하고 적응해야하는 당면한 현실임을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이에 경각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대응 조치를 취할 의지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8월 말에 며칠 간 비가 내리고 동풍이 불더니, 태풍도 피해갔던 막바지 더위는 결국 물러나고 우리의 일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가을의 향기가 채 닿기도 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지진의 새로운 공포가 엄습한 것이다. 7월 초에 한 차례 가볍게(?) 지나간 울산 앞바다 지진이 경주로 장소를 바꿔, 추석 전후에 더욱 강력한 전진(前震)과 본진(本震)이 일어났고, 그리고 지금도 다발적인 여진(餘震)이 계속되고 있다.

포항은 울산이나 경주의 진앙지(震央地)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지축의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하물며 홀로 고층 아파트에서 느낀 공포는 공황 그 자체였다. 울산 지진 때만 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날 줄 알았지만 하지만 그것은 예고에 불과했다.

추석 연휴 직전 월요일, 방금 저녁 식사를 마친 나른한 시각에 갑자기 거실 바닥이 울렁이고 창문이 덜컹이며 흔들리는 소리, 공포감에 질려 아무 것도 할 수도 없고 아무런 대책도 없는 망연자실함, 두려움의 시간은 왜 그리 길게 느껴지는지… 누군가 미디어에 올린 동영상을 보면 그런 순간에 어떻게 촬영할 여유가 있었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허둥지둥 넓은 교회 마당으로 차를 몰고 와 주차를 하니 연이어 차들이 들어오고 주민들이 모여든다. 대구의 집과 의료원, 주위의 지인들과 연락해보니 통화두절이고 카카오톡마저도 전송불능이다. 안절부절의 시간이 30분이 지나서야 통신이 복구되었고 가족과도 통화가 되어 겨우 한숨을 돌렸다. 진앙지인 경주야 사정이 오죽하랴. 동서 형님과 연락해보니 장식장이 넘어지고 애지중지하든 도자기가 전부 깨어졌다한다. 자정이 되어서야 아파트에 들어와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노심초사하다가 겨우 새벽에야 잠을 이루었다.

지진이 많은 이웃 일본의 선례를 보아왔기에, 우리들 대부분은 지진의 경험이 없어도 기본적인 대피법은 알고 있으며 행동요령 역시 미비하지만 어느 정도는 매뉴얼화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인가. 지진의 가공할만한 파괴력은 발생 순간에 결정이 난다. 매뉴얼의 숙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매뉴얼에 따른 행동이다. 반복적인 교육과 훈련에 의해 습성화된 행동이 우선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그 다음이 아닐까? 그러나 이미 오랫동안 시행되어 왔던 전쟁공습훈련이 완성된 매뉴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흐지부지 형식적인 훈련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늦장 대응에다가 가로 늦게 호들갑을 떠는 정부와 언론을 보면 이번 지진 또한 그리 되지 않을까 우려해 본다.

단층지진(斷層地震)이란 지각변동에 의해 지층에 누적된 에너지 스트레스가 지표면으로 발산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지층 70km 미만에서 일어나는 천발지진(淺發地震)은 지구 어느 곳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맨틀의 유동성이나 지층의 구조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지각의 무게 균형을 깨뜨리는 도시 개발과 대형 댐 건설, 지하 핵실험 등이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기후온난화의 전세계적인 영향과 함께 금세기에 부쩍 잦아진 지진 발생은, 현대문명의 이기적 행태가 초래한 또 하나의 인재(人災)가 아닐지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일이다.

올해는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각종 사회적 스트레스가 끊임없이 누적되어만 간다. 직장에서 퇴근하는 저녁에는 뉴스를 보기 싫어 아예 그 시간대에는 TV를 끄거나  채널을 바꾼다. 매스컴과 SNS에서 전해지는 정치와 경제의 난맥상, 북한 핵실험으로 인한 국가 존망의 위기까지 심각한 스트레스가 우리의 일상을 괴롭히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법조계의 고위 인사들의 비리와 부패, 여야를 가리지 않는 포퓰리즘적 민주주의, 무절제한 보수와 표리부동한 진보의 대립, 직역 집단과 지역이기주의의 광기, 그리고 소통부재 권력의 아집(我執)이 우리를 분노케 하고 절망에 이르게 한다.

폭염 그리고 연이은 지진과 한국 사회의 총체적 위기, 청명한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조차도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지는 가을 저녁이다. 일주일 후 한 차례 더 강한 여진이 발생하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지나가는 화물차의 굉음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함은 공포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공통적인 경험의 결과이다. 그래도 이제는 여진이 일어나도 집 밖으로 피신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아무런 여진 없이 시간이 흐르면 오늘의 지진 이슈는 매스컴과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 갈 것이다.

그러나 지진 당시 경고나 대피 문자 한 번 없었던 국민안전처처럼, 뒤늦게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누군가는 우리를 안전 불감증으로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망각이란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와 안정을 갈구하려는 인간의 본성이다. 폭발 직전의 각종 사회적 스트레스에 지친 시민들에게 안보불감증과 안전 불감증을 말하기 전에, 정치경제계의 지도층 인사, 그리고 오만한 국회권력의 당신들부터 깨어 있어야 한다.

사회적 위기는 먼저 내부에서 비롯한다. 위기의 대가는, 권력 지향의 포퓰리즘과 내부 분열을 선동하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당신들이 아니라 오로지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의 몫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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