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흔히 한다. 그러나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다이아몬드는 사람들과 밀접한 환경에서는 그리 안정하지 못하다. 다이아몬드 원석의 고향은 변화가 없는 깊은 지하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래 있던 곳에서 채굴되어 지상으로 올라온 뒤, 최대한의 인내심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 리처드 포티, `살아 있는 지구의 역사' 본문 중에서

겨울 새벽 동이 틀 무렵이면, 신천(新川)의 제방 아래로 동네 처녀들이 모여든다. 마을 어귀에서 쏟아져 나온 하얀 저고리와 검정색 치마를 입은 스무 살 안팎의 앳된 처녀들이 냇가로 향하고, 살을 에듯 천변의 차갑고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은 징검다리를 조심스레 건넌다. 신천 벌판의 푸르스름한 미명은 그녀들이 종종거리며 자갈돌을 밟는 소리로 깨어나곤 했다.

두 분 누님도 그렇게 이른 아침의 신천을 건너가, 밤이 이슥해서야 피곤에 지쳐 돌아왔다. 퇴근하는 누님의 옷과 몸에서 항상 풍겼던 삶은 누에고치의 느끼한 냄새, 건너편 방천(防川) 너머에는 시내에서 가장 높은 굴뚝을 가진 방직공장(紡織工場)이 있었고 그곳이 누님들의 일터였기 때문이다.

누님은 어쩌다 한 번씩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의 빈 통에 번데기를 가득 채워 오곤 했었다. 간식거리가 별로 없던 그 시절에는 번데기가 유일하고 맛있는 야식이었고, 지금도 나는 자식들이 질색하는 번데기를 좋아한다. 부드럽게 씹히면서 짭조름하고 고소한 그 맛, 그 옛날 누님들의 애틋한 정성과 고생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초등학교 이전의 아스라한 기억으로 신천의 제방 사이에는 검은 콜타르를 칠한 거대한 목조교각이 있었다. 그러나 `사라호' 태풍이 몰고 온 홍수(洪水)로, 흙과 자갈로 쌓은 연약한 제방과 함께 다리도 무너져 떠내려갔다. 주민들의 불편 때문에 시당국은 두어 번 교각 건설을 시도했지만 신천의 잦은 물난리로 인해 결국은 포기해 버렸다. 대신 물길의 중심에 자그만 콘크리트 다리를 만들었고, 신천의 가장자리에는 사람들이 건널 수 있도록 몇 개의 징검다리를 남겼다. 그렇지만 잠수교가 물에 잠기는 여름철에는, 동네 사람들은 시내로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위험천만한 경부선 철교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신천을 경계로 대구시의 중심과 외곽이 나뉘어졌고, 외곽의 신천동은 상수도와 전기뿐만 아니라 아무런 공중 편의시설조차 구비되지 않았었다. 신천동 동쪽의 야트막한 민둥산 사이로 난 황토길을 지나면, 논과 밭, 사과 과수원들이 멀리 동촌(東村)의 금호강까지 펼쳐졌다. 대구의 동쪽 변방은 여느 외진 시골과 다름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즈음 신설(新設)된 동대구역과 고속터미널에서 도심을 연결하는 넓고 육중한 신천교를 축조하면서, 변두리 시골의 동네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변화가 일어났다.

산이 순식간에 사라질 리야 없겠지만, 내가 살아오는 동안 우리 주변에서는 그와 비슷한 일들이 자주 벌어져왔다. 도심의 확장과 함께 외곽의 작은 산들이 수시로 깎여 나갔고, 잉어와 자라 같은 민물고기가 풍성했던 못과 커다란 호수조차도 흔적도 없이 메워졌다. 급속한 경제 발전과 도시 확장의 역사(役事) 그리고 인구의 증가로 인해, 우리가 살아왔던 생활 터전이 신도시나 공장지대로 변하는 것은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광경이었다.

버드나무가 한껏 어우러진 고수부지 공원 벤치에 앉아 신천의 동쪽 전경을 바라본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산동네의 따닥따닥 붙은 슬레이트(slate) 지붕 집들과, 미로처럼 얽힌 좁고 우중충한 골목길도 모두가 사라졌다. 경사가 심했던 철거 지역은 불도저와 같은 건설 중장비로 한껏 평평하게 다져져, 15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면서 인근 동대구역과 지하철의 역세권(驛勢圈) 신도시가 되었다. 언덕배기 마을의 정상에 있던 교회는 아파트 주거지역 아래로 내려와 신축되었지만, 보상을 받은 철거민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현재의 교인들은 새롭게 이주한 역세권 주거지역의 주민들이 대부분이다.

주위 전체를 둘러보아도 어릴 적 신천과 산동네의 흔적과 자취는 어디에도 남겨져 있지 않다. 그래도 한 줄기 어슴푸레한 기억이나마 되살릴 수 있는 것은, 신천을 가로지르는 경부선 철교의 앙상한 시멘트 골조와 을씨년스럽게 퇴색한 페인트 색깔뿐이다. 신천의 물길을 잡고 공원화 사업으로 증축한 콘크리트 제방은 도시의 남북과 동서를 연결하는 대구 교통로의 중심축(신천대로와 신천 동로)이 되었다. 또한 신천의 흐름을 조정하여 사시사철 물이 찰랑이는 신천보, 그 바닥의 깊은 곳에는 지하철 전동차가 달린다.

오래 전 고인이 되신 아버지가 살아 돌아 오신다한들 길이나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찾아 오신다한들 머물 곳조차 없는 신천지에 발이나 붙일 수 있으랴. 오래 전에 외지로 떠나 칠순에 접어든 누님도 이곳의 변화를 알지 못한다. 이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누님들이 설령 차편으로 이곳을 찾는다 해도, 아무런 기억의 자취도 없는 이 천변을 무심코 지나칠 수밖에 없으리라.

나에게 고향이 사라졌다, 그것도 40년도 더 지난 과거에…. 강산이 변한 것이 아니라 아예 눈앞에서 송두리째 없어져 버린 것이다. 개발도상국의 우리는 고향이 사라진 세대이지만,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 고향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현대인의 복잡하고 다양한 도시 생활 속에서 이동성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이제는 모두가 시대적 삶의 요구에 따라 수시로 생활터전을 바꾸어가고, 고향의 원천적인 존재 의미가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고향은 뿌리 깊은 역사적 정체성과 같은 것이다. 지난날의 골목과 거리, 우물과 낡은 판잣집들, 신천의 징검다리…, 그곳에서 힘겹게 하루를 살아갔던 사람들도 이미 오래전에 고향을 떠났다. 외양의 형체가 사라지면 존재의 기억, 내면의 가치도 변한다. 그리고 삶의 배경에 깃든 마을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관습도 잊어져 가고, 향수로 얼룩진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누군가의 어렴풋한 기억도 서서히 스러져 간다. 급속한 변화와 기억상실의 도시, 지나온 세월의 자취 어디쯤에서 나는 타인의 거리를 헤매고 있는가.

시가지 고층 빌딩 사이를 지나는 구름에 노을이 지고, 신천공원의 탁한 물빛에는 희뿌연 저녁 안개가 서리고 있다. 하나 둘씩 켜지는 강변도로의 가로등 아래, 신천과 신천동이라는 낡은 철제 표지판이 바람에 떨꺽이며 흔들린다. 주인 없이 새겨진 지명(地名)의 무심한 그림자, 천변 언덕에 밀집한 아파트 옥상에는 뎅그러니 휘황한 추억의 달덩이 하나만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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