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지봉 산행 길에 아카시아 꽃이 눈처럼 쌓여 있다. 노랗게 변색한 푸석푸석한 꽃잎들, 길섶 바람에 흩날리며 봄날의 말미를 장식한다. 떡갈나무 숲에 부서지는 싱그러운 햇살과 시원한 그늘에는 무더운 여름이 성큼 발치 앞에 다가선다. 정상 봉우리를 향하는 가파른 나무계단의 울타리에는 앳된 모습의 넝쿨 장미가 고개를 들고, 붉은 꽃잎에 비친 오월은 신록의 짙푸른 빛깔로 산마루에 깃발처럼 나부낀다. 산행 길의 나른한 오후, 미루나무 쉼터에 누워 하릴없이 잎사귀를 세다가 문득 구름처럼 흘러가는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을 본다.

새해 전날 밤, 성냥팔이 소녀가 춥고 어두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성냥을 팔지 못하면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소녀는, 꽁꽁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성냥 한 개비를 긋는다. 그러자 빨갛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온갖 봄의 정경이 나타난다. 첫 번째 성냥의 불꽃에 매화꽃이 비치고, 두 번째는 벚꽃이, 세 번째는 라일락이…, 거리는 차츰 어둠이 걷히고 온갖 꽃들이 만발한다. 그리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이팝나무 가로수의 거리가 나타나고 골목길에는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하다. 소녀는 따사롭고 포근한 봄의 정경을 보기 위해 남은 성냥을 몽땅 써버린다. 그러자 사방은 밝아지고, 소녀는 꽃 더미에 안긴 채 하늘 호수로 올라간다.

지난 겨울 황량한 산길을 걸으며 그려 본 정겨운 봄날의 풍경. 오월은 환상적인 동화에서보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홀로 상상했던 그림보다 훨씬 풍성하며 화사하다. 하지만 다시 맞이하는 신선한 청록의 계절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사도 그러할까? 긴 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의 거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소녀, 성냥불에 비쳐진 것은 정작 양귀비꽃과 같은 환각일 뿐이다.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은 현실과는 다른 우리의 희망이었음을…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미래를 생각하며 혼자만의 꿈을 꾼다. 살을 에는 차가운 거리에서나, 무더운 여름날 땡볕 아래에서조차도 우리는 미래에 대한 준비와 상상의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뇌가 가진 정의조차 모호한 지능의 알고리즘보다는 내일을 예측하며 설계하고 만들어 가는 것, 현실을 뛰어 넘는 상상력과 감성의 영역이 동물의 뇌와 확연하게 구별되는 인간의 진화적 특성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편의점과 같은, 골목길의 허름한 가게에서 휴대용이나 가정용 성냥을 팔던 시절이 있었다. 불꽃이 일며 풍기는 성냥개비의 특이한 유황 냄새가 싫었지만, 라이터가 귀했던 당시에는 불을 피우거나 지피기 위해 성냥이 개인이나 가정의 필수 상비품이었다. 또한 아무데나 문질러도 불길이 이는 미군들의 성냥은 시골 사람들이 구경도 못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성냥의 시절을 살았던 중노년층의 사람들은 험난했던 과거의 고난을 기억하며 향수에 젖는다. 60년대 중반에 중고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베이비붐의 전후 세대와는 달리 영유아 시기부터 음식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한 전쟁 세대로 불린다. 그 당시 영어 텍스트에 실린 미국인들 생활상의 흑백 그림과 사진은 환상적인 동화처럼 보였고, 미국은 우리가 동경하는 유토피아 그 자체였다. 잔디 정원을 가진 아담한 주택, 풍요한 음식과 다양한 과자, 고급 가구가 갖추어진 넓고 쾌적한 아파트, 키 큰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햇살 밝은 공원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그리고 집집마다 갖춰진 TV와 주차된 승용차를 보면서, 가난한 한국의 청소년들이 상상하기에는 너무 벅찬 그런 세상에 대해 우리는 늘 부러워하고 갈망했었다.

접하기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선진국에 대한 어린 시절의 동경과 환상, 개발과 발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세대는 경제적으로,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상당 부분 과거의 꿈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월의 숲속에 흘러넘치는 평화로운 신록의 정경처럼 지금의 우리는 과연 안락하고 행복한가?

수명 연장의 효과로 노인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여, 공원은 아이들보다 할 일 없는 노인들의 쉼터가 된지 이미 오래이다. 가족관계의 해체는 핵가족, 편가족으로 이어지고, 노부부만이 낡은 아파트의 썰렁한 공간을 지키고 있다. 그마저도 자식으로 인한 정신적이고 경제적인 고통은 오늘을 살아가는 중노년 세대의 불편한 진실이다. 인구 증가와 함께 무한급수로 늘어난 승용차는 도로와 주거지를 점거하고 교통체증과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어 버렸다. 오십 년의 세월, 세상은 바뀌었어도 우리는 아직도 외롭고 황량한 거리에서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을 좇고 있다.

보수적인 구체제의 프레임은 붕괴되었지만,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방식이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소위 `공위(空位)의 시대(times of interregnum, Antonio Gramsci)'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지만 사회적 정의를 무시한 선동적 민주주의의 개념만이 거리를 활보하고, 이기적 집단주의는 극한적인 대립의 양상을 보인다. 60년대를 풍미했던 절약과 인내라는 삶의 철학은 사라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지속 가능한 성장과 분배 포퓰리즘, 소비만능주의의 헛된 망상이 우리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발목을 잡고 있다.

작금의 사회는 현실의 불안정성과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한다. 고용의 불안정성, 타인과의 불안한 관계, 신구 세대의 대립, 경제적 양극화와 소외 계층의 증가, 환경의 문제 등 무엇 하나 해결이 어렵지만, 사회의 심층부까지 스스로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이기적 물질주의와 일과성 소비문화가 만연하고 있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Aldous Huxley)'를 부정하는 야만인의 독백처럼 위기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전쟁이나 기아, 천재지변이 아니라, 우리가 소마(soma)처럼 탐닉하고 즐기는 문명적 일상의 사소한 것들로부터 폭발해 나올지도 모른다.

주말 산행의 고즈넉한 벤치에서 지난 세월의 자취를 되돌아본다. 현대 소비사회의 물질적인 풍요 속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차라리 가난했던 성냥의 시절에 우리가 품었던 감성적 소망이 더 아름답고 행복했던 것일까. 결코 해피엔딩일 수 없는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겨울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성냥을 다 써버린 소녀는 골목길 한 구석에 미소를 띤 채 죽어 있었다. 그러나 소녀가 어떤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는지, 얼마나 기쁨과 행복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하였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겨울의 흔적은 용지봉 올레길의 언저리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숲에는 누군가 옛 사람을 부르듯 아카시아 꽃잎을 흩날리는 바람 소리만 나지막이 귓전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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