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정치의 저울이다. 무게를 표시하는데 필수적인 저울은 가장 정확한 기준을 필요로 하는데 그 기준이 무너지면 평형(平衡)을 잃어 바로 서지 못한다.

극소단위 약의 무게를 재는 천 평은 조금만 기울어도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다.

정치의 저울은 개인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수천만, 수백만명의 국민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 제정, 시행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 법 위에서 펼쳐지는 정책은 국가 백년대계를 염두에 두고 행해져야지 아침에 공표됐다가 저녁에 다시 고치는 조령모개식이 되어서는 권위가 서지 않을뿐더러 국민이 법을 우습게 아는 빌미가 된다.

중병에 걸린 서구 사회주의식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우리 정책에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다.

바로 의료계의 극렬한 반대 속에 강제 시행되고 있는 성분명처방 시범사업이 그것이다.

지난 9월 17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이 시범사업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데도 희망자가 14.5%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전 국민을 약사에 준하는 전문지식을 가지라는 뜻인지 과거에 먹던 약의 이름만 알지 성분명을 알 수 없는 환자들은 오히려 혼란스러울 뿐이란다.

과거에는 의사로부터 처방받은 약을 아무 의심 없이 사먹고 효과를 보았는데 싶어도 약사가 “종전의 약은 비싸고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다. 이 약이 더 맞을 것 같다”라고 권하면 그때부터 의사에게 불신감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약값이 특별히 싼 것도 아니다. 신문에 난 기사대로라면 1주일치 위궤양약이 800원 가량 싸다니 몇 백원 때문에 한 푼의 이익도 못 보는 의사만 욕을 먹게 된 것이다.

약에는 플라시보(placebo)효과도 있다. 그리고 환자의 건강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약사가 아니라 의사다.

소화제, 위장약, 진통제 등은 환자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안 먹어도 되고 먹어도 해가 없는 경우에 처방하는 경우도 있다.

약은 인체가 병이 안 생긴 과거로 돌아가는데 도움이 되고 실제 치료효과도 있지만 그 병을 극복하는 데는 수술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체 자신이 고치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 병세에 따라 처방해주는 약을 약사가 병만 보고 약을 주는 꼴이니 그 약을 먹는 환자들만 불쌍할 뿐이고 “홍보가 잘 안 돼 처음만 그 시행이 지지부진 할 뿐 환자들의 이해가 높아지면 성분명처방이 늘어날 것”이라는 보건정책 당국자의 체면유지용으로 계속 실시될 것 같다.

이런 약장수식 정책이 오래 가면 과연 덕볼 사람이 누군가 탁상에 앉아 현장감 없는 정책을 구워내고 삶아내는 행정당국자가 더 잘 알 것이다.

감기 몸살 약에 들어있는 잘 정제하면 마약도 될 수 있는 약을 돈만 주고 사서 멋대로 황홀한 천국에서 노는 무리가 있다는 매스컴의 보도를 그들이라고 못 봤을 리는 없다.

차라리 약의 안전성이 보장돼 성분명처방을 했다는 위장약, 소화제, 소염진통제 등은 슈퍼마켓에서 팔도록 하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 좋지 않은가?

나이 들면 거의 모두 갖고 있는 다리 아픔, 시큰거림, 온 몸이 쑤시는 근육통 때문에 이 약국, 저 보건소 등을 돌아다니며 수백, 수천개의 파스나 소염진통제를 사재기해 수천 억 원의 건 보료가 들어가는데 놀라지 않았는가?

그 약들이 모두 안전성이 보장된 약이다.

어째서 모든 정책 중 의료정책만 이렇게 시작하자마자 뒤뚱거리는가!

좀 창피하더라도 부작용이 발생하면 즉각 중단하는 용기 있는 자는 정말 없는가?

의료계는 현실화될 희망은 안보일지라도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신)를 기다리며'와 같은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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