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소자 원장

만일 인간이 자신의 삶 주변 일을 모두 기억하고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 및 수치스러운 기억과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이 얽혀 정신적 혼란으로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이다. 　

실제 신의 건망증 결과인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순식간에 기억되어 영원히 잊혀 지지 않고 어느 단어에 연상되는 의미 때문에 특이반응이 나타나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받은 1920∼30년대 한 러시아인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사건이 있었다고 증언한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한 책의 주인공도 있다. 　

그만큼 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잊혀지지 않는 온갖 기억은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망각은 자신을 보호하는 중요한 정신적 방어 기능이다. 그래서 견딜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이 아름다운 과거까지 망각하게 만들어 자신의 과거, 심지어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까지 까맣게 잊어 그 기억을 되살리려는 주위사람들의 노력으로 기억을 회복, 행복을 되찾는다는 영화도 나왔다. 50∼60년 전 아주 오래된 영국영화 `마음의 행로'가 관객들의 눈물 깨나 짜냈다. 　

요즘의 의료계 현황은 진짜 잊고 싶은 세월이다. 신에게 빌어서라도 그 세월을 공백으로 만들고 싶은 심정이다.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얼뜨기 좌파정권이 시장경제를 완전히 무너뜨리지도 못하고 의료제도만 사회주의로 만들어 갖가지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다. 의료계는 살아남기 위해 과당경쟁으로 내몰리고 단일 공보험 체계를 가진 의료보험공단이라는 거대조직이 현실에 맞지 않는 의료수가를 강요함으로써 자멸 일보직전의 위기에 빠져있는 것이다. 　

모든 의료기관은 강제적으로 환자를 진료하고 완치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노력에 의한 보답은 공단이라는 거대조직이 물가상승률도 못 따라가는 수가를 강제로 정하고 원가에 못 미치는 수가를 보완하기 위해 보험급여 치외법권인 비급여로 수익을 보충하는 비정상 행로로 가게 만들고 있다. 　 GOP대비 의료비지출은 5%로 OECD국가 중 최하위인데 통신비가 11%나 되는 기형적 사회상을 만들고 있는 현실에 왜 의료계만 두드리는지 알 수가 없다. 세금은 또 얼마나 높아졌는가. 　

과표는 해마다 올라가 병원수익이 해마다 줄어드는데도 세금은 더 불어나 세금정산 때마다 영세 의원들은 홍역을 치르고 있다. 　 정부는 자기 돈 하나도 안내고 건강보험료를 올리는 방법으로 국민의 세 부담을 늘리고 의료계를 쥐어짜`분배정책의 성공, 건강권의 평등' 등 생색만 내 포퓰리즘적 정권의 표 사기에 혈안이다. 　

바야흐로 대선의 해다. 온 국민의 눈과 귀는 후보선출, 100년은 가리라던 집권여당의 공중분해에 쏠려있다. 국민생명에 직결돼 있는 의료계 현안은 정치 아우성에 묻혀 질식 상태이고 몇 개월도 안 남은 임기 말 대통령은 온갖 탈법적인 언동으로 정치판을 뒤흔들어놓고 있는 뜨거운 여름이다. 　

의료계는 이런 정치판에 휩쓸려서도 안되고 긴장을 조금만 늦추어도 의료사고다, 의료불친절이다, 돌팔매를 맞는 처지이니 이런 조그만 목소리도 국민과 정부 양쪽 모두에게 배척받을 수 있는 만큼 차라리 모두 잊고 이 고난의 세월을 생존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은 자신이 처한 곤경을 잊을 수 없어 고통이다. 　

`고뇌의 나날에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가장 큰 비참함'이란 말은 누가 했던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국가,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는 사람만큼 두려운 것은 세상에 없다고 했는데 그 두려운 일이 의료계를 먼저 강타하고 있는 느낌이다. 의료비를 강제로 싸게 하라. 의료비가 싸지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동반되어 떨어지는 의료의 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싸게 하고 질은 높여라. 이것도 강제로 할 수 있을까? 아! 모든 것을 잊고 싶다. 특히 여느 해 보다 더 뜨거워지리라는 이 여름에 ….

남소자 <서대문 나산부인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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