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소자 원장

나는 조물주가 인간 세상에 내린 가장 큰 축복이 자연의 휘황찬란한 색깔이며 인간이 이 색깔에 의해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게끔 하는 오묘한 메커니즘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색깔이 없다면, 그 색깔을 감상할 수 있는 감정의 풍요가 없다면 인간생활은 너무나 삭막해서 인간다운 삶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조물주가 만든 가지각색의 색깔인 거대한 정원 같은 지구라는 천체에 살면서 인간은 색깔마다 예술적 감각을 느낀다. 순백의 흰색은 깨끗함과 청결함을, 검은 색이나 잿빛은 우울과 절망감을 본다고도 한다.

나는 흰색에 묻혀 산다. 병원의 벽이 온통 흰색이며 간호사의 캡이나 제복도, 나의 가운도 깨끗한 흰색이다. 우중충한 기분이 안 들고 마음의 평온을 얻는 색이 흰색이고 천사 같은 나이팅게일의 옷도 흰색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이 흰색이 공포의 상징으로 느끼는 것이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아이러니다. 병원에만 오면 아프게 하는 주사바늘이 먼저 생각나서일까? 아이들은 의사와 간호사언니의 흰 가운만 보면 벌써 공포감에 휩싸인다. 그래서 병원내부에 색깔을 넣자는 얘기도 있고 진료실의 각종 가구들을 변화 있는 색깔로 장식하기도 한다.

새빨간 장미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지만 붉은 색을 좋아하는 민족은 중국인 외에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궁궐이나 집 내부의 단청도 붉은 색으로 칠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다른 민족은 붉은 색은 피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붉은 색으로 인식되어 있는 공산주의와의 민족상잔을 겪어서인지 가만있는 붉은 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킨다. 정치인들 사이에 툭하면 나오는 색깔론도 바로 붉은 색으로 친북좌파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색깔의 아름다움은 사람마다 느끼는 감각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진다.

서구인들은 노란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선정적인 폭로나 인간의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풍조를 황색선전(yellowism)이라고 비하한다. 중세의 창녀들은 보통여성과 구별하기 위해 노란 베일로 가려야만 했고 사형집행인의 옷도 노란색이며 유대인들 인종청소를 할 때 노란색 `다윗의 별' 마크를 달도록 하기도 했다. 우울과 절망은 보통 잿빛으로 표현된다. 도시의 우중충한 시멘트벽에 갇혀 사는 빈민들을 인간 쥐로 비하하는가 하면 Gloomy Sunday(우울한 일요일)라는 음악이 유행하자 전 세계 젊은이들 수천 명이 자살하기도 했다. 반대로 절망과 음침을 상징하는 검은 색은 느끼는 감정에 따라 신비의 마력을 뿜어내기도 하는가 보다. 세기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신의 목소리라고 극찬한 샹송가수 줄리엣 그레코는 무대에 설 때 마다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그러나 그녀가 풍기는 마력은 청중들을 포근하게 했고 분위기는 색깔의 의미와 반대로 음침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청운의 꿈을 보랏빛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9세기 영국 규수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는 짙은 보라색으로 뒤덮인 황무지 무어(moor)에 피어난 `히스'꽃을 신이 창조한 색깔의 극치로 찬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을 당하면 흰 베옷을 입었으나 구미사람들은 검은 상복을 입는다. 그러나 왕관을 버리게끔 한 영국 에드워드 8세와 심프손 부인의 사랑은 온통 청색이었다. 1차대전 이후의 방황하는 인류를 표현했다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청색시대에 매혹된 것일까? 그는 왕관을 버린 윈저공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푸른색 상복을 입어 세상의 관습에 또한번 도전했다.

인간은 이렇게 신이 주신 색깔로 자신의 인생을 채색하며 산다. 생존만을 위한 사랑엔 색깔이 없다. 무미건조란 말도 색깔이 없음을 의미하고 창피를 당했을 때 `무색하다'는 말도 무색(無色) 즉, 색깔이 없다는 말과 통한다. 지금 이 시대는 잿빛 구름으로 꽉 덮여있다. 이때 `나 홀로'만 이라도 인생을 아름답게 채색하며 살자.

남소자 <서대문 나산부인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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