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인숙 교수

한글의학용어 제4집이 나온 지 거의 6년이 되었다. 의협은 기회 있을 때마다 새 용어 사용을 강요하여 왔으나 대부분의 의사들은 변경된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새 용어를 외우려는 사람은 학생들과 일부 교수들 뿐이다. 이와 같은 무관심 속에 개정된 의학용어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만 고생을 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러한 `부자연스럽고 생소한' 개정한글용어 사용을 계속 주장할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고자 이 글을 쓴다.

학생·교수외 대부분 개정용어 무관심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원어]->[의학용어집 제 3집]->[제 4집 용어] 순이다. Appendicitis->충수염->막창자꼬리염, Atrial fibrillation->심방세동->심방잔떨림, Clavicle->쇄골->빗장뼈, Colonoscopy->결장내시경술 ->잘록창자보개검사, Duodenum->십이지장->샘창자, Glomerulonephritis->사구체신염->토리콩팥염, Femur->대퇴골->넙다리뼈, Osteoporosis->골다공증->뼈엉성증, rale->수포음->거품소리, Sinusitis->부비동염->굴염, 동염, stent->스텐트->덧대, Sternum ->흉골->복장뼈, Streptococcus->연쇄상균->사슬알균, Thyroid->갑상선->방패샘.

개정된 용어 사용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는 지금 국경 없는 무한경쟁 시대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의 동료와 선후배들의 노력 덕분에 의학 분야, 특히 임상분야는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물론 의사들이 영어를 잘 해야 한다. 영어로 발표도 해야 하고 외국 환자도 보아야한다. 영어논문, 특히 SCI 논문을 잘 써야 교수임용도 되고 승진에서 누락되지도 않고 연구비도 탈 수 있다. 또한 장차 우리 국민들을 먹여 살릴 신약이나 신기술을 개발하여 외국에 팔아야 한다. 그런데 의대교수들 사이에서는 학생들을 돕고자 펴내는 한글 교과서들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의 세계경쟁력을 오히려 떨어뜨리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있어 왔고 실제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일부 학생들이나 전공의들의 영어 원서나 논문 읽는 실력이 걱정스러운 수준이다.

우리는 과거 그 많은 해부학의 원어 이름들을 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기억한다. 영어권 의대생들은 이름 한 개만 외우면 되지만 우리나라 의대생들은 각 단어마다 이름을 적어도 세 개씩 외워야한다. 우수한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재미를 불어넣어 주어야하는데 오히려 이들을 괴롭히는 셈이다.

둘째, 의학용어는 의사들만 쓰는 것이 아니라 간호사, 기사, 환자, 기자 등 여러 직종의 의료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이자 일반인들도 사용하는 언어의 일부다. 따라서 이들도 모두 새 용어를 다시 외워야 한다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생각해 볼일이다.

셋째, 이와 같은 용어변경의 배경은 1992년에 의학회에 만들어진 남북한의학용어 비교연구위원회의 연구결과라고 짐작된다. 물론 우리 모두의 염원인 통일에 대비하여 북한 사람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에 대비하고자하는 의도는 알겠으나 세계화 시대에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기 때문이다.

넷째, 법률용어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악명이 높기 때문에 최근 법제처에서는 `알기 쉬운 법률용어 만들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에 반해 의학용어 개정은 `어렵고 생소한' 용어로의 변경이다. `알기 쉬운 말'과 `순수 우리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즉 `순수 우리 말'이 대부분의 국민들이 난생 처음 듣는 단어라면 그런 단어로 용어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토리' `덧대' `복장뼈'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

상황이 이러한데 개정된 의학용어 사용을 고집하는 것은 날로 방대해지는 첨단 의학지식을 습득하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후배들에게 불필요한 짐을 더 얹어주는 것이다. 의학은 과학이고 과학에는 세계 공통언어가 있다. `www'를 구태여 `세계에 깔린 거미줄'로 바꾸자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색한 용어고집은 시간낭비일 뿐”

개정용어 사용을 주장하는 것은 실익 없는 민족주의이자 국경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다. 요약하여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 ① 각 명칭마다 우리나라말을 하나씩만 알자. (위 예문 중 가운데 단어) ② 이미 보편화된 단어들은 그대로 사용하자. ③ 한글표기가 어려운 용어는 영어발음을 그대로 사용하자. 인플루엔자, 스텐트, 빌리루빈, 골프, 라디오, 등과 같이 의학용어도 우리나라말 화하여 그대로 사용하자. 더 이상 새 이름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강제로 외우게 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정도로 이 세상은 한가롭지 않다.

박인숙 <울산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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