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형 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정년퇴임을 하고 나니 여러 변화가 생겼다. 실버패스가 교통비를 무던하게 도와주고 전철 경로석이 친근하게 여겨지고, 사물과 사건들의 틈새가 조금씩 보이면서 상대적으로 혼자 시간이 늘어나는 등 이러저러하게 바뀌었다. 그 중에서 가장 달라진 건 아무래도 진료실 안 풍경이다. 이따금 이런 말을 듣곤 한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께 삼십 년 넘게 진료를 받아왔고, 여기까지 따라 왔습니다만, 선생님이 이렇게 설명을 잘 해 주시는 분인 줄 몰랐습니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 한 의사와 몇 십 년 함께 병을 추스르고 얼러 오면서 쌓인 정으로 건네주는 환자의 고마운 덕담에 정년퇴직한 의사의 진료실은 슬그머니 따스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소중하게 받아들이며 얼추 일 년이 되어가는 겨울, 더불어 읽을 따스한 시 한 편을 써달라는 청탁을 한 일간지로부터 받았다. 험한 사건들로 더 춥고 건조한 의료 현장에서 함께 읽을 따뜻함을 한 편의 시에 담아 달라는 것이다. `함께 읽고 따스함을 느낄 시.' 어떠한 따스함을 시 속에 담을까. 세상 전체를 데울 엄두는 나지 않고… 그래도 가장 잘 아는 세상은 어차피 아프고 불편한 이들을 만나는 진료실이 아닌가. 마침 정년을 맞아 옮기며 규모는 작아졌지만, 오랜 환자들의 체온 닮은 덕담이 따스한 진료실 안에서 서늘하고 건조한 `누군가'를 데울 시를 짓자. 그러면, 그 따스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탈리아 토리노의대 신경생리학과 파브리지오 베네데티 교수는 건강한 이가 환자가 되면서 다음의 네 단계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건강한 사람이 아픔을 경험하여, 고통을 줄이고자하는 욕구가 생겨, 의사를 만나고, 치료를 받는다.' 의사는 대개 세 번째 단계의 환자를 만난다. 이때에 환자는 신뢰와 희망이, 의사는 공감과 동정이 발동하여 작용하여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긍정과 부정으로 갈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갈림길에서 온전히 긍정의 결과만 열매 맺힐 수 있도록 이끄는 도구는 바로 말, 말의 작동이라 생각한다. 이미 이천 년 전에 히포크라테스는 “의사는 환자의 말만 잘 들어도 정확한 진단에 이를 수 있고 상당수의 환자는 잘 들어주기만 해도 치료 된다”고 말하였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책에도 의사의 덕목 중 으뜸을 말을 잘하는 것, 즉 의사소통을 잘하는 의사를 최고로 적고 있다. 명언이나 옛 기록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진료의 가장 중요한 도구는 말이다. 대화를 통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언어 소통은 의학적 진단과 치료의 정확성을 높이는 훌륭한 수단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환자-의사 사이의 유대관계 형성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 `말'을 재료와 도구로 따스함을 줄 시를 짓자.

`누군가'를 따스하게 할 시를 지으면서 그 `누군가'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허공에 몇 번씩 썼다가 지운다. 하얀 가운으로 상징되는 의료의 `누군가'를 떠올리며 의료에 동참하는 이들의 말소리와 숨소리가 바로 의료의 숨결이라는 생각에 정현종 시인의 `흰 종이의 숨결'을 읊어보기도 한다. “흔히 한 장의 백지가/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더 깊고,/그 가장자리는/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거기 쓰는 말이/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이런 저런 생각과 마련은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귀에 담고 마주 앉은 환자의 손목에 촉각의 끝을 대고 가슴을 들으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밤새 흰 가운 품에서 입속말을 하더니/슬며시 말문이 터졌다//쿨럭 대는 발자국이 진료실에 들어서/손목에서 가슴을 열면/박동에 맞추어 말을 시작한다//새벽 찬 바다에서 오는 길이군요/도중에 들꽃에 취해 서녘 끝까지/노을을 지나치게 마셨나봐요/손대는 곳마다 노을이 묻어나/기침마다 붉은 체온이 터져//시들은 햇볕의 수군거림이 식어가네요/더 식기 전에 체온을 드려야겠어요/제 길이보다 더 멀어질까 두려워/구푸린 입과 귀/그 목청과 고막의 체온을 내어 드리지요//자, 숨을 깊게 내들이세요/한바탕 소나기 꽃밭을 지나/우레 소리 꽃망울로 벙글고/슬며시 움돋는 따스한 목청” (`말하는 청진기', 유담 `경향신문')

말이 사라진 진료실. 검사 데이터만 가득한 진료실. 마주 보고 앉아 있어도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 멀어짐은 청진기의 발명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청진기가 발명되면서 직접 귀를 대고 듣던 몸 안의 소리를 청진기 길이만큼 떨어져 듣게 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멀어져 이제는 아예 환자는 최첨단 진단기기 속에 누워있고 의사는 동떨어진 곳에서 모니터를 통해 바라보고 있다. 이런 형편 속에서도 다정한 미소로 환자를 맞이하고 살며시 손목의 맥박을 촉진하며 혈압을 재는 의사들이 있다. 청진기 길이만큼 멀어진 거리를 조금이라도 가깝게 하려고 입과 귀가 달린 청진기로 허파와 심장과 이야기 하려는 의사들이 있다. 나는 그런 청진기를 따스한 목청과 고막을 지닌`말하는 청진기'라 부르기로 한다.

오랜 세월 나와 함께 늙고 있는 청진기가 문득 옹알이를 하기 시작한 것도 정년 후 진료실 안에서 일어난 뜻하지 않은 변화 중의 하나다.

의사신문  webmaster@doctorstimes.com

<저작권자 © 의사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