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형 중
한양대병원 신경외과

서브라임/킬링디어

나는 병원이 싫다. 병원을 돌아다니다 마주치는 무표정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얼굴과 가운에 걸친 명찰을 번갈아가며 바쁘게 검색하는 그들의 좀비같은 눈동자가 싫다. 어디 트집 잡을 건수는 없는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조금만 건드리면 화산처럼 폭발할 준비를 마친 전투력 만렙의 검투사처럼 보여서 싫다.

병원은 상쾌하지 않다. 이 곳에서 일용할 양식을 노동의 대가로 제공받지만 개운하지 않은 후텁지근한 여름장마 같은 느낌은 떠날 때까지도 영속될 것 같다. 병원은 삶과 죽음이 찰나의 순간에 뒤바뀌는 미스터리한 도시괴담의 온상이며,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병원만 오면 갑갑한 이유는 온갖 사연과 원한을 가진 유령들이 영화 〈곤지암〉에서처럼 떠돌며 배회하는 탓은 아닌지 모르겠다.

나는 병원이 무섭다. 전공의 때 심야의 응급실에서 술취한 환자 두피를 봉합하다가 주먹으로 맞고, 회진 중 사망자의 어머니가 휘두른 돌에 머리를 찧었다. 교수가 되고 나서는 중환자실에서 보호자에게 빙 둘러싸여 사망한 환자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사죄를 하고, 49제 때에는 납골당에 가서 조문을 하는 증명사진을 찍어 보냈으며, 정문 앞에 보호자들이 수의를 입고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며 관을 들고 병원을 다닌 퍼포먼스를 몇 개월 겪었다. 당시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트라우마는 죽을 때까지 떨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또 혼자가 될까 무섭다.

나는 종종 슬프다. 007 제임스 본드처럼 5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면허번호(살인 면허번호)를 가진 채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한 의료행위의 의도와 법에 저촉되는 재산축적 과정을 제삼자가 캐묻게 되는 현실이 슬프다. 경과가 좋지 못한 환자 보호자와의 면담에서 “큰 병원에 가지 못했던 게 유일한 잘못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는 정말 서럽다. 얼마 전 응급실 폭행사건으로 병원 응급실에 경찰관을 상주시켜야 한다는 여론조사를 시행한 C일보 온라인 판의 댓글(비의료인이 적은 글이겠지)과 30%가 채 되지 못한 찬성률(아마도 의사가 대부분일 것이다)은 슬픔을 넘어 절망에 이르게 한다.

영화에서 설정한 캐릭터는 대개 시대상을 반영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똘레랑스의 범주 안에 위치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영화에 나오는 의사들은 주인공이 아닌 한 비정상적으로 그려진다. 〈신세계, 2012〉에서 석동출 회장은 반대파로부터 고의로 자동차 사고를 당해 심야에 응급수술을 받는다. 수술실에서 나온 집도의가 사망소식을 전하자 어김없이 멱살을 잡힌다. “병원에서 돈을 받아 쳐먹었으면 죽은 사람도 살려내야지, 담당자 나오라고 해.” 억울하지만 어딘가 낯이 익지 않은가. 죽으면 다 의사 잘못인 모양이다.

〈아는 여자, 2004〉의 줄거리를 밑바탕에서 실질적으로 이끄는 인물은 주인공 동치성에게 3개월 시한부 판정이란 오진을 내린 의사이다. 의학적으로 허점이 많은 부분은 극의 진행을 위해 감수한다지만 병원측의 오진을 알아차린 주인공이 병원 복도를 뛰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욕을 해대는 장면은 유쾌한 코미디로 치부하기는 버겁다. 〈반창꼬, 2012〉 역시 표면상 멜로드라마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의사의 오진을 깔고 있다. 응급실에서 보호자(남편)의 팔뚝에 새긴 문신을 보고 환자가 구타당한 것으로 오인하여 지주막하출혈 환자를 놓친 여의사는 결국 면허정지를 당한다. 환자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오늘 내일 하고 병원에서는 장기이식을 권유하면서, 보호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의사가 고귀한 직업이란 사실을 비틀어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석하련다.

〈서브라임, 2007〉은 표면적으로는 의료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진 백인 중년남성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기저에는 다양한 상징과 이미지로 표출되는 주인공의 불안증과 공포감에서 비롯된 상상을 구현한 영화이다. 간단한 내시경 시술 이후 다리가 썩고 흑인(화이트 가운)에게 팔다리가 잘리며, 믿었던 가족들이 그를 배신하자 주인공은 끝내 자살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은 주인공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일상생활 속의 막연한 불안감과 의심에서 비롯된 상상 속의 일이다. 한 나약한 가장이 항상 지니던 의심(유색인종에 대한 선입견), 의료시술에 대한 막연한 부정에 대한 잘못된 상상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되는 과정을 그려내지만 영화가 끝난 후 제시되었던 상징들(인종차별, 최후의 만찬, 동성연애, 부인의 간음, 간호사와의 성행위 등)은 이후에도 한참을 곱씹어야만 한다.

흉부외과 전문의 스티븐은 음주 후 시행한 수술로 환자를 죽게 만든다. 사고 이전 완벽했던 그의 가족은 어느 날 집으로 찾아 온 16세 소년에 의해 조금씩 균열이 발생한다. 소년은 의료사고로 사망한 환자의 아들로서 죄책감에 친절히 대하는 스티븐에게 점점 더 가혹한 형벌을 내리게 된다. “내 가족을 죽였으니 선생님 가족도 죽어야 균형이 맞겠죠? 첫 단계는 사지가 마비되고, 두 번째는 거식증에 걸리고, 세 번째는 눈에서 피가 나고, 결국엔 죽게 될 겁니다. 누굴 죽일지 한 사람을 선택하세요. 아니면 다 죽을 테니까요.” 실업자 엄마와 남겨진 아들은 적법한 절차에 의한 의료사고 배상이 아닌 함무라비 식의 제로섬의 균형을 요구한다. 〈킬링디어, 2017〉는 속죄(성스러운 사슴 죽이기)라는 그리스 신화 속의 상징을 표제로 이용하여 인간의 이기심을 심판하는 부조리극이자 블랙코미디이다. 처녀신 아르테미스의 숫사슴을 해친 아가멤논 왕에게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면 트로이 원정을 허하겠다는 신탁은 딸 대신 바쳐진 암사슴으로 대체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 속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며, 소년의 신탁에 의해 아들과 딸에게는 실제로 형벌이 가해지면서 일부러 의도된 배우들의 인위적인 연기와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조감슛에 의한 신의 시선에서 견지하는 징벌은 불쾌함의 정수가 무엇인지 묘한 희열을 맛보게 해준다.

영화 속에서 의사 스티븐은 두 가지 함의로 읽힌다. 손으로 직접 생사를 가늠하는 신적인 능력을 가진 의사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처벌 역시 신탁이 아닌 한 불가능하다. 한편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사건 앞에서 무기력하여 형벌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며 스스로 가족의 처단자가 되는 네메시스로 체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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