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집안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도 씩씩함 잃지 않아
정신분열 환자 목격 후 연민과 치료 의지에 정신과 진로 결정
“정신과 의사,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공감 능력 가장 중요”

최근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정신과 의사로서 보낸 63년 세월과 복잡다단했던 90년 간의 인생이야기를 담은 책 `정신과 의사로 살아온 한 여성의 길'이 출간됐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 부터 현재까지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개인사에 관한 기록이다. 동시에 이 책은 대한민국의 역사 기록이면서 한국정신의학과 한국정신치료학회의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최근 이 책의 주인공인 김동순 선생을 만나 어렵고 힘들었던 격동의 시대에 대한민국 여성으로,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정신과 의사의 길을 걷게 된 그녀의 삶을 들어봤다.

■어린시절 어려움, 기죽지 않은 그녀
1925년 김동순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항일운동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40년 간 옥살이와 쫓기는 생활을 반복했고, 그로 인해 김 선생과 가족들도 여기저기 떠도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당시를 `가난과 공포가 끊이지 않던 어린 시절,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어렵고 힘든 시절'이라고 회상하면서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따라 도망을 다니다보니 초등학교만 4곳을 다닐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시간 속에서도 김 선생은 부모를 원망하거나 현실을 비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좋은 머리와 여러 가지 재주를 갖춘 재능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했고, 그 덕분에 기죽지 않고 자라왔다고 했다.

김동순 선생은 어릴 적 잦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머리' 덕분에 공부는 상위를 놓치지 않아 반장을 도맡았다. 또 손에서 책을 놓지 않던 어머니를 닮아 글재주가 좋았다. 글짓기를 하면 선생님이 반 친구들에게 읽어줄 정도로 글을 잘 썼을 뿐만 아니라, 붓글씨 솜씨도 뛰어났다. 김 선생은 한국여자의사회 90년사 표지 글을 붓글씨로 직접 썼을 만큼 명필을 자랑한다.

더욱이 어린 시절 키도 또래에 비해 컸던 김 선생은 배구는 물론 농구와 육상도 잘해 선수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많은 장점에 비해 그녀의 `단점'이 있다면 성질이 급한 반면 욕심이나 다른 사람과의 경쟁심도 별로 없고, 마음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욕심이 많았다면, 지금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의대 진학
김동순 선생의 아버지는 그녀가 `문학가'가 될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대신 어지럽고 불안정한 일제 강점하에 한국인이 친일을 하지 않고도 능력껏 살기 위해선 의사가 낫다고 생각하셨다. 김 선생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하기로 했다.

하지만 의대진학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당시 한국 학생들은 일본 유학이 가능했지만, 만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그녀는 만주 국민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있는 전문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일본 유학을 위해서는 유학생 예비교에 가야했고, 성적순으로 1∼5등까지는 동경여의전, 그 다음은 대판여의전, 제국여의전을 보내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1년의 교육과정을 통해 예비교를 2등으로 졸업했지만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라는 이유로 일본 유학생 자격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노여움은 물론, 본인의 실망도 컸지만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고등학교 은사(당시 교장)의 도움(교장의 절친인 허규 교수에게 지원서를 요청)으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원서를 접수할 수 있었다.

김 선생은 “구두시험을 잘 보지 못해 합격할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는데, 며칠 뒤 `입학을 취소해도 되겠냐'는 전보를 허규 교수의 동기인 오진섭 교수로부터 받고 우여곡절 끝에 1944년 의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며 인간적인 정(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의대 문학가, 의학보다 문학 `사랑'
김동순 선생은 의과대학 교육이 비현실적이고 학교 분위기도 만족스럽지 못하자 `연극'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학년 1학기를 마친 여름방학이 끝나고도 학교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의대 교육에 흥미가 없었다. 박정재라는 친구 덕분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됐고, 재시험에 걸리지 않도록 공부를 해 놓고 연극 문학 등에 활발한 활동을 했다.

연극부 시절 김 선생은 의과대학 3학년이던 1946년 `현대의 디오게네스'란 단막극을 초연으로 1947년 `백의의 사람들', 1948년 `배부 와냐' 공연에 참여했다.
그녀는 “내가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라디오를 통해 해방 소식을 함께 들었던 단짝 친구 이은영이 나를 주인공으로 염두에 두고 `현대의 디오게네스'를 창작해 무대에 올린 것이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김 선생이 연극무대에 오른 활동을 보면, 인터뷰 내내 `나는 겁이 많고 말수가 많지 않다'라고 말한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아마도 그녀에게는 칼 찬 순사들이 아버지를 잡으러 왔던 모습이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아 학교에서 일본 교관에게 시달렸던 것이 불안함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정신분열 환자 아픔, 정신과 결심
김동순 선생은 문학과 연극을 하면서 인간의 문제에 관심은 있었지만, 처음부터 `정신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임상실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분만이나 맹장 수술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 졸업했다.

그녀가 정신과를 선택한 데에는 4학년 2학기 당시 서울대 의과대학 신경정신과 명주완 교수의 강의와 임상실습이 큰 영향을 미쳤다. 김 선생은 “우리나라 정신과 의사 1호인 명 선생의 강의에는 재미 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이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며 정신과를 택하는데 적지 않은 동력이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 선생이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첫 임상실습에서 만난 2명의 `정신분열 환자'의 모습을 본 후다. 극도로 흥분한 젊은 군인과, 정신병적 흥분상태에서 싸리 빗자루에 불을 붙여 병실에 휘두르고 다닌 16살 소녀였다.

김 선생은 “내가 정신과를 할 운명이었는지, 겁이 많던 내가 두려워하지 않고 이들을 감싸 흥분을 멈추게 했다”며 “이들이 너무 불쌍해 정신적인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전했다.

이런 그녀의 천성은 미국 뉴욕대 벨뷰정신병원 레지던트 1년차 시절, 흑인 살인수를 진찰하면서 빛을 발했다. 김 선생은 모든 환자를 같은 기준에서 인간으로 대우하면서, 살인수의 마음도 무너지게 만들었다.

■국내 첫 여자정신과 의사의 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정신과에 대한 인지도가 낮았다. 그녀가 대학 졸업 전 전공 희망란에 `정신과'를 써 냈더니 담임교수와 급우들이 놀랄 정도였다. 당시 서울대 외에는 정신과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 정신과 의사가 없던 것은 물론 개업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과는 `미친사람들만 온다'는 두려운 인식 때문에 `여자가 할 만한 과'가 아니라는 인식이 많았다. 이런 걱정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급우들은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해해 줬다. 연극 공연과 문예부장을 맡았던 당찬 모습과 조용하고 말없는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서울대 조교로 들어가 본격적인 정신과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그녀는 서울대 정신과에서 15명의 남자 의사 가운데 유일한 여의사였고, 우리나라 최초 여성 정신과 의사였다.

김 선생은 남자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그리고 선후배가 짝을 지어 지도하는 시스템에서 공부하길 좋아해 `콘사이스(concise·휴대용 사전)'라는 별명을 가진 이동식 선생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1남 4녀의 자녀를 뒀다.

그녀는 “이 선생은 공부하길 좋아했다. 방 안에 책이 가득 차 있을 정도였고, 영어, 일어, 불어, 독일어, 노어까지 구사했다”면서도 “공부에 관해선 철저하고 열정적이었지만 아내의 생일을 단 한 번도 챙길 줄 모르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김 선생은 6.25 전쟁을 겪은 뒤 1957년 대구에 `태양의원-소아과·정신과'를 개원했고, 1962년에는 성북동 병원을 짓고 1965년 `동북신경정신과의원(현재 정신치료연구원)'을 열었다.

김동순 선생의 병원은 `정신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다. 그녀의 의대 재학 시절만 해도 `정신치료`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지만, 정신과를 시작할 때 정신치료를 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이동식 선생 밑에서 공부하다보니 흥미가 생겨 오늘 날까지 정신치료를 하는 정신과 의사로 살아오게 됐다.

김 선생은 1971년부터 한국여자의사회에 참여한 뒤 1974년 제9대 회장을 맡게 됐다. 1986년에는 `여자정신과의사회'를 발족했고, 한국여성정신의학회 초대회장(1986년∼1989년)을 역임했다. 남편은 `한국정신치료학회'를 창립했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와 공감능력' 중요
김동순 선생은 63년간 `정신치료자'로서 살아왔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생각이 들지 않아 아쉽다고 했다. 다섯아이의 엄마로, 며느리로, 아내로 힘든 세월을 살다보니 한 가지도 만족스럽게 공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역할도 제대로 못한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그녀는 정신치료를 하는 사람은 `인격'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치료자에게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도와주려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감정에 빠지면 안되지만, 다정다감한 사람이 치료자로서 소질이 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특히 “의사로서 의술만 앞세우지 말고 사람에 대한 배려가 가장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정신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환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의사는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 “정신치료자에게 있어 무엇보다 `공감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홍미현 기자  mi97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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