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이 한국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가슴 깊숙이 박혀 있는 체제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게 우선입니다”

유혜란 센터장.

16년 전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건너 온 유혜란 북한체제 트라우마 치유상담센터장. 북한의 경성의대를 졸업한 유 센터장은 한국에서 상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탈북민의 트라우마 치유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북한에서의 여의사로서의 삶과 탈북의 계기, 센터 운영 등에 대해 털어놨다.

평양 출신인 유 센터장은 경성의대를 졸업한 뒤 6년간 의사로 일했다. 비교적 엘리트 층에 속했던 그와 그의 가족들은 다른 북한 주민에 비해 선택받은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삼촌이 정치범으로 체포돼 친인척 중 일부가 지방으로 추방되면서, 불안한 북한 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 유 센터장은 결국 부모님과 두 딸, 남편과 함께 탈북을 결심하게 된다.

유 센터장은 “1998년 7월 부모님이 먼저 중국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고, 저는 1999년 겨울 북한에서 나와 중국과 몽골에서 체류하다 2000년 5월에야 한국땅을 밟았어요. 16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그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에 따르면, 북한 의대는 우리나라와 달리 7년으로 예과 1년·본과 6년 과정이며, 위생학·동의학·약학·임상학으로 구성돼 있다. 유 센터장은 의대에서 임상학을 전공한 뒤 군 병원 내과에서 6년간 근무했다.

그는 “북한에는 전공의 개념이 없고 의대 교육과정에 실습이나 수련과정이 포함돼 있어요”라며 “세부적인 전문과목도 나눠져 있지 않아요. 졸업생들은 국가가 배치해 주는 병원이나 과로 가야하고, 각 과에서 전문의 과정을 공부하게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다시 의사로 활동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면허체계가 달라 다시 의사면허를 취득해야 했고, 경제적인 문제도 함께 얽혀 있었다.

유 센터장은 “북한에서는 의대 졸업시험이 국가고시를 대신해 의사면허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한국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선 다시 국가고시를 봐야 했었죠. 게다가 당시 36살이었는데, 35세까지만 등록금이 지원되는 상황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2002년 한신대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2013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탈북민들을 통하여 본 북한체제-트라우마 불안’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박사 논문을 쓰면서 ‘북한체제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 센터장은 “북한은 병리적 국가로 북한 주민들은 공포수위가 높은 사회 환경 속에 반세기 넘게 노출돼 있었어요. 한국에서 탈북민이 민주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체제 트라우마 치유가 우선돼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우리나라. 하지만 탈북민 자살률이 한국인에 비해 3배 이상 높다. 게다가 탈북자 4명 중 3명이 ‘힘들 때 전화 한 통 걸 사람이 없다’고 응답하는 등 이들은 말 그대로 ‘사회적 죽음’에 직면해 있다. 북한에서의 어려운 환경과 탈북 과정에서 죽을 고비도 이겨낸 탈북민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감 속에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유 센터장은 “북한은 끊임없는 억압과 항시적인 불안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불안을 회피하는 가치를 추구할 수밖에 없어요. 결국 자연스럽게 형성된 편집성향, 의심, 타인의 의도 왜곡 등으로 범죄율도 높죠. 하지만 기존에 쌓아왔던 경험과 과거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체제 트라우마 회복도 어려워요”라고 토로했다.

이런 탈북민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유 센터장은 북한체제 트라우마 치유상담센터를 설립하고 탈북민을 대상으로 치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북한체제로 인한 트라우마와 상처를 먼저 인지하고, 피해자 의식이나 폭력적 성향, 왜곡된 대인관계를 교정해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또 지난해 9월부터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NKST(북한체제트라우마) 전문상담사 교육을 1년, 3학기 과정으로 진행하고 있다. 탈북민 3만 명을 넘어 북한의 2400만 명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상담사를 배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 센터장은 “탈북민 3만 시대”라며 “이제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수용,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물질적인 후원도 중요하지만, 1:1 멘토-멘티 프로그램 등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심리적인 지지가 필요해요”라고 강조했다.

이지선 기자  sundream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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