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리에서 30년을 개업하다보니 수많은 인생들을 만났다. 부모님이 모두 도망가서 할머니와 사는 아이, 비전향 장기수로 28년을 감옥에 있었던 80세노인, 복권에 당첨된 후 도박으로 가정이 붕괴된 50대 남자, 식민지 시대에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달하던 95세의 할아버지.

환자가 많지 않아 대화시간이 아무래도 길어진다. 질환들이 스트레스로 인한 것들이 많아 현재와 과거를 묻다 보면 지난 일들이 술술 나오기 시작한다.

요즘 까다로운 50세의 남자환자가 내원한다. 의료보호 환자로 병원이나 약국에 지불하는 돈도 거의 없지만 집에서 필요한 상비약을 적어서 가지고 온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이 필요한 약도 적어 오는 경우도 있다. 원하는 검사도 이것저것 요구한다. 항상 인상을 쓰며 다닌다.

“요즘 어떻게 사세요?” 어떤 인생인지가 알고 싶어서 말을 걸었다. 34세에 발병한 관절염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이나 택배일도 못하고 빨리 걷지 못하기 때문에 대리 운전도 못한다고 한다. 군대 간 아들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고 아내는 유방암으로 10년 전에 죽었다고 한다.

“유방암이 있었는데 남편이 힘들어 하니 자신의 병을 숨기고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나중에는 몸이 다 썩어 죽데요.” 아무 감정도 없이 하는 말을 듣고 까다로운 -몸이 아프고 돈이 없어 더 까다로운 남편 옆에서 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못하고 죽어간 불쌍한 여인의 고통을 생각하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모두 휴가를 떠났는지 병원은 한가하다. 장예모 감독이 만든 영화 `인생'을 보았다. 장예모 감독은 나와 동갑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세계사를 경험한 사람이다.

1940년대에서 60년대의 중국의 격변기에 한 가정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도박으로 지주에서 빈민으로 몰락한 것이 혁명 후 생명을 건지게 되고 내전이 일어나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에 나가고 문화혁명으로 딸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장예모 특유의 영감과 끈질김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념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가정이지만 이념과 역사 속에서 무력해진 개인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녀들을 키우고 살려야 한다는 부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중국판 국제시장이라고 할까?

각 사람의 인생은 개별적이지만 보편적이기도 하다.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 각자의 삶도 시대의 큰 틀 안에서 벌어진다.

수필가 김진섭은 1930년대와 40년대에 쓴 글들에서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같이 되는 듯 보이면서도 그 결말에 이르고 보면 전혀 다른 괴물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요술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하였듯이 우리 의지와 인생은 다른 것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이고 개별적인 것 같지만 크게 보면 보편적이다. 아무리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 돈을 많이 번 검사도 정치적 모함을 해가며 사는 정치인도 모두 죽는다는 것이 보편적 진리다. 자신의 인생과 자녀들의 인생만을 특별하게 만들려 할 때 불행은 잉태된다.

뜨거운 여름이다.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 지가 어제 같은데 꽃은 지고 초록의 여름이다. 지구 끝날까지 계절의 흐름은 바꾸지 못할 것이다. 봄의 따듯한 태양은 꽃을 피우고 여름의 강렬한 태양은 열매를 맺게 해주고 가을의 시원한 날씨는 씨를 갖게 해준다.

최근 1달 사이에 몸무게가 특별한 이유 없이 5kg 정도 줄었다. 암이라면 이미 전이가 된 상태일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내 안정을 찾았다.

본래 내 존재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잠시 세상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왔다가 없었던 것으로 돌아가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수많은 인간들이 태어났다 돌아가지 않았나? 마치 춘하추동의 계절이 반복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런대로 잘 살아왔는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수술을 해서 몇 년을 더 살면 무슨 의미가 있으며 항암제로 연명하면 무엇 하겠는가?

세상에 던져진 지가 66년이 된다. 그 동안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 - 밥 먹고 학교 다니고 돈 벌고 애들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결혼 시키는 일들을 하며 보냈다.

세상에 던져지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다. 인생은 보편적이다.

검사를 받아볼 생각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운동하며 보냈다. 체중이 다시 붙으면 좋고 계속 줄어서 말기 암으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이 되었다. 다행인지 체중은 회복되었지만 병원에는 아직 가지 않았다.

이번 일로 큰 진리를 깨달은 것 같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욕망에 붙잡혀 허우적거리는 것이 가장 비참한 인생이란 것을 깨달았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이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

“그런즉 즐겁게 먹고 마시고 자는 것도 해 아래서 우리에게 준 선물이니라.”

[편집자주] 지난 2013년 9월, 101회를 시작으로 `진료실 주변' 연재를 다시 시작했던 이주성 원장님이 이번 호 200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이 원장님은 지난 3년 가까이 심혈을 기울여 원고 집필에 몰두, 전국 독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수고해 주신 이 원장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의사신문  webmaster@doctorstimes.com

<저작권자 © 의사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