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수명이 70세가 안 되었던 20∼30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70 이후의 인생을 설계 하지 않았다. 개인뿐 아니라 정부도 65세 전후로 인생설계를 하고 연금계획을 세웠다. 누구도 이렇게 오래 살줄을 몰랐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문제가 발생하는데 가정이나 국가에 노인 문제가 심각하다. 과거에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자녀들도 부모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했으나 이제는 오래 살다 보니 애절한 마음보다는 갈등의 문제가 생기는 시대가 되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30세까지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30년을 자녀들 키우는데 쓰고 남은 20∼30년을 자기를 위해 쓸 시간이 확보된 셈이다. 이 시간을 얼마나 유익하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가 행복해지고 번영할 수가 있기 때문에 제3의 인생이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은퇴한 선배 의사가 도시생활을 접고 들어간 산속에는 송화가 황사처럼 날려 앞이 보이지 않는다. 60대 후반에 산으로 왔으니 벌써 5년째 자연 속에 머물러 있다. 지금 내 나이에 은퇴한 것이다.

혈압과 당뇨도 있고 이제 그만 쉬어야겠다고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쉽지는 않았지만 65세면 직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공직자나 회사원이면 이미 퇴직하고도 몇 해는 지났을 나이라 생각되었고 무엇보다도 자신과 아내의 건강상 남은 인생을 쉬면서 건강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단조로움이 우울하고 슬프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누구든지 단순한 생활을 경험해 보라고 한다.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체면이나 두려움, 분노는 사라지고 바람과 구름과 새소리를 들으며 진정 평화와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한다.

냇가에서 쌀을 씻어 나무로 불을 지피고 냄비로 지은 밥에 텃밭에서 자란 상추에 쌈장으로 먹는 밥은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음식과 비교할 수 없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고 한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는 고독, 문명이 없는 어둠에 울었다. 문명에 길들여졌던 선배는 자연에 묻혀 사는 법을 배우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제는 시원한 바람의 냄새를 맡고 밤이면 하늘에 뿌려놓은 아름다운 별들, 아침이면 문안하는 새소리들을 들으며 해가 뜨면 밖에 나가 산을 오르거나 텃밭을 가꾸고 해가 지면 깊은 사색에 잠기다가 곧바로 잠이 들었다고 한다. 잠귀가 밝은 선배는 도시에서는 밤에 자주 일어났지만 이제는 한 번 잠에 빠지면 아침까지 깊은 잠을 잤고 어느새 당뇨와 혈압은 정상수치로 돌아와 약을 끊었다고 한다. 우리의 질환이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이렇게 살다보니 사람이 한 세상 사는 데는 그리 많은 돈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터득했다고 한다. 돈 때문에 안간힘을 쓰며 이웃들에 해를 준 것을 생각하면 자신이 수치스러웠고 평생을 공부하고 밥벌이를 제공한 병원을 접을 때 허전하고 불안했으나 일에서 해방된 새로운 인생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고 한다.

자녀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족하는 선배의 삶을 보고 내 안에 잠자고 응고되었던 울림이 들리는 듯하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영화 `지바고'를 보고 자연에 대한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자연은 나에게 열병을 앓게 했으며 그 강호(江湖)에 대한 깊은 시름은 아직도 남아 있다. 특히 지바고가 `바리키노'에 돌아와 아내와 둘이서 감자를 캐는 장면과 시를 쓰는 장면은, 나에게 의사와 농부와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 무렵 영국의 낭만파 시인인 `키츠', `워즈워드', `예이츠'와 `신석정', `김영랑' 시인처럼 자연을 노래한 시들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 후 40여년의 세월이 빠르게 지나갔다. 긴 방황 끝에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결혼,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다. 숨 가쁜 현실 속에 남편과 아버지의 책임을 다 하며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자연에 대한 동경과 열병은 나의 무의식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가끔씩 꿈틀대고 있을 뿐이다.

깊은 산 속을 걷거나 아름다운 강가에 앉아 있으면 문득 문득 고등학교 때의 자연에 대한 격정이 스쳐지나가지만 병원에 출근하며 일상으로 돌아오면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에 눌려 감정은 정지되고 응고되고 말았다.

지금 나는 현대문명의 화려함과 편리함을 향유하면서도 깊은 내면에는 문명을 거부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의 삶을 돌아보면 매끄러운 문명과 자연을 향한 투박함 속에서 어색하게 동거하며 불안하게 살아온 느낌이다.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처음으로 난 돌아가야겠어 힘든 건 모두가 다를 게 없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뿐이야 약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

(서울의 달 주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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