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준 CM병원 내분비내과 과장(시인·수필가)

마침 누님 생신을 맞아 감이 넉넉히 달려있는 수원의 누님집에 갔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 역할을 하는 누님은 당신 시집가던 날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동생이라며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 듯 회식을 하고 나서 화성행성 구경을 시켜주셨다.

잘 보전되어 곳곳이 켜켜한 의미로 가득한 행성에서 눈에 띈 것은 `노래당(老來堂)'이었다. 1797년 원행 때 정조가 화성에 내려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정성껏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지은 집이다. 원래 노래(老來)란 말은 “늙어서 천명에 의탁하고/편안히 머물면 그 곳이 고향이어니(老來尤委命 安處卽爲鄕 노래우위명 안처즉위향)”라는 백거이(白居易 : 당나라 시인)의 시 `사십 오세'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한자는 다르지만 정조는 노래자를 생각하여 이름을 지었을 것이라 전해진다. 그 근거는 정조 21년(1797) 8월 원행 때에 정조가 지은 시 `노래당구점(老來堂口占)'에서는 정조를 노래자에 비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래당 속에 활짝 핀 좋은 얼굴/ 동산과 정자의 이름 거듭 걸어 늙을 틈이 없네

평상시엔 감히 늙었단 말 하지 못하고/ 가만히 노래자처럼 색동옷 입어보네.

`老來堂裏好開顔/苑?重扁未老閒/恒居不敢言稱老/竊比萊翁尙衣斑(노래당리호개안/원사중편미로한/항거불감언칭노/절비래옹상의반)' - `화성성역의궤 부편2', `어제(御製), 노래당구점(老來堂口占)', 정조. [구점(口占)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읊음. - 필자 주]

약 2400년 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 효심이 지극한 노래자(老萊子)가 있었다. 전란의 세상에서 늙은 부모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난을 피하여 몽산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는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사는 학덕이 높은 은사(隱士)였고 출생과 사망 시기는 미상이다. 은자로 지내게 된 데에는 아내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노래자의 아내는 남편이 부패한 정권에서 일하기보다 농사짓고 살기를 강하게 원하여, 일화에 따르면, 노래자의 지혜로움을 알고 초나라 왕이 보석과 비단 등을 보내며 고위직을 제안했을 때 강력히 말렸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저명한 여인의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곡진하였던 노래자는 일흔 살이 되어서도 부모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알까봐 늘 부모 앞에서 때때옷을 입어 어린이의 모습으로, 장난감이나 새를 갖고 놀며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여 부모를 즐겁게 해드렸다. 놀다가 새나 장난감이 땅에 떨어지면 애처럼 엉엉 울고, 어느 날엔 물통을 들고 마루로 올라가다가 일부러 넘어져 물을 뒤집어쓰고 흠뻑 젖은 꼴을 보여드려 부모가 한껏 아들의 아기 때 모습을 연상하며 즐겁게 웃게 하였다. 더구나 노래자도 자신의 나이를 부모에게 알리지 않아 부모는 고까옷을 입은 아들의 재롱을 보고 웃고 지내면서 자신들의 나이도 잊고 지냈다.

노래자효봉이친. 행년칠십, 작영아희, 신저오색반란지의. 상취수상당, 사질부와야, 위소아체, 농추어친측, 욕친지희(老萊子孝奉二親. 行年七十, 作쵥兒戱, 身著五色斑?之衣. 嘗取水上堂, 詐跌?臥地, 爲小兒啼. 弄雛於親側, 欲親之喜) (소학[小學] 계고[稽古]편)
(노래자는 어버이를 효로 봉양하는데 나이 70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유희를 하니 몸에 오색이 현란한 색동 무늬 옷을 입었다. 일찍이 마루에서 물을 취하는데 일부러 땅에 넘어진 듯하고 아기처럼 울었다. 부모 곁에서 새를 가지고 놀며 어버이를 기쁘게 하고자 했다.)
18세기 김진태의 시조 `세월이 여류(如流)하니'가 자연스레 기억난다.

“`세월이 여류하니 백발이 절로 난다/뽑고 또 뽑아 젊고저 하는 뜻은/북당에 친재(親在)하시니 그를 두려워함이라' 어버이 앞에 자신의 머리털이 세어짐을 불효로 한탄하였다. 어버이에게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버이의 마음에 걱정을 끼쳐드리는 불효로 안 것이다.”(최승범, `시조 에쎄이', 82∼83쪽)

어린 재롱과 함께 노래자는 하루 세끼 부모의 식사 음식을 늘 손수 지어 드렸는데 항상 달콤하고 보송보송하여 잘 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정성을 다했고, 부모가 식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 마루에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노래자는 칠순의 백발노인이 되었지만 그의 부모님은 그의 효성 덕분에 건강하고 정정했다고 한다. 그는 `노래자' 열다섯 편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노래자의 효심은 `이십사효(二十四孝)'(중국의 유명한 스물 네 명의 효자 이야기를 모아 정리한 책-필자 주)에 실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노래자의 효성은 `노래지희(老萊之戱)', `반의지희(班衣之戱)' 등의 고사성어를 남겼고, 정조로 하여금 수원 화성행성에 `노래당'을 세우고 `노래당구점'을 짓게 했다. 그리고 나이 많으신 누님을 따라 나섰다가 덥석 만난 노래자의 효심은 열심히 늙어가는 동생에게 `늙어서 효도해드릴' 부모님의 부재(不在)를 생각게 한다. 어머님 돌아가신 해, 강의를 하려고 춘천행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차에 오르며 서둘러 챙겼던 `어머니'를 되도록 난해하지 않게 노래한 김대규 시인의 시집 `어머니 오 나의 어머니'에 실려 있는 시 한 수와 함께.

한 밤중에 밖에 나와/밤하늘을 보노라면/“얘야, 춥겠다.”//방에 들어와/우두커니 앉았노라면/“얘야, 자지 않고 뭘 하니.”//자리에 누워/뒤척이면/“얘야, 이불 잘 덮고 자야지.”//깊은 잠/꿈속에서도/“얘야, 나쁜 일 하지 말아라.” (김대규, `목소리-어머니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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